천천히 읽고 싶은 책이 있다. 그런 책은 남은 페이지가 적어지는 것이 아쉬워진다.
홍세화가 쓴 생각의 좌표라는 책이 그렇다.
- 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 사람은 이성적 동물, 합리적 동물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 기존 생각을 수정하려면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용기가 필요한데, 대부분은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는 용기만 갖고 있다.
-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금의 이념이다.
- 폭 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토론과 직접 견문, 성찰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의식세계를 형성한 사람은 자기 삶에 책임을 질 줄 알며 아무리 팍팍한 세상이라도 당당할 수 있다.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 우리 몸은 건강하지 않는 대부분의 경우 자각증세를 보여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해 주지만 우리 생각은 그렇지 않다.
- 우리가 우리 안에 채우는 ‘생각’이나 ‘주장’ 또는 ‘이념’은 이 사회에서 강조되는, 이 사회를 관통하는 ‘지배적인 그것’일 수 밖에 없다.
-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 국가 권력이 장악한 제도교육과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미디어에 의해 넘칠 정도로 채워지는 의식세계는, 특히 한국처럼 제도교육이 민주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스스로 책을 읽지 않을때 필연적으로 지배세력이 요구한 것만으로 채우게 된다.
- 아무리 좋은 가치라 해도 몸에 익히지 않으면 공염불에 머물기 쉽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려면 익히고 또 익혀야 하는 것이다.
-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로 학업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우리는 피부색깔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두뇌를 선택할 수 없다. 두뇌의 용량과 기능은 사람마다 다른데 오로지 문제풀이와 암기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인종주의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확하게 한다.
- 한국의 택시기사들이 불친절하다지만 택시기사들만 불친절한 것은 아니다. 돈 없는 사람들에겐 모든 한국 사람들이 불친절한 것 같다.
-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견해는 견고하다.
- 사람들은 민주노총에 대해, 전교조에 대해 알고 있을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 ‘알 필요가 없는 것’,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 “그런데요. 내 주위에 나와 같은 사람들 너무 많거든요. 그 사람들도 직접 당하지 않으면 절대로 몰라요. 아니, 당해도 모를 거에요. 직접 싸워보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한나라당을 열심히 찍을 거에요. 예전의 나처럼요.”
- 선거 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분석과 비평이 끝나면서 후보들이 내건 공약(公約)들은 차차 잊혀진다. 공약(空約)으로 끝난다.
- 여러 해 전, 실업률이 10퍼센트를 넘으면 사회 불안을 넘어 ‘사회 폭발’의 가능성까지 있다고 말했던 프랑스 학자들은, 당시 실업률이 25퍼센트나 육박했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남부 지방이 어떻게 비교적 안정을 유지했는지 주목했다. 그 나라들은 프랑스에 비해 사회안전망도 허술한데 어떻게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그들의 답변은 그 지역은 아직 핵가족화가 진행되지 않아 가족 이기주의나 개인주의가 발전하지 않았고, 씨족관계와 가톨릭 전통이 상부상조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지역사회의 안전망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모아졌다.
사회안전망이 스페이나 이탈리아에 비해서 열악한 우리나라 농어촌 사회에서 기능하고 있는 씨줄과 날줄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명절에 고향을 찾는 우리 모두 한번쯤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 인간은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살아남으려고 굴종한다. 인간이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면 억압과 착취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죽는 대신 굴종을 택한다. 인간의 삶은 모진 것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는 계속된다.
- 자연은 인간의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 파괴되어 죽는다. 자연이 놀라운 복원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인간의 파괴 행위는 속도에 있어서 자연의 복원력을 앞지른다. 그리하여, 자연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끝까지 발버둥치겠지만 인간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