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685904
한겨레신문에 부고가 떴다.
홍세화. 그분이 77세로 별세했다. 이제서야 나의 초등학교 선배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 고인은 지난해 9월 언론 인터뷰에서 “이성의 빛을 잃는 순간, 우리는 인간임을 포기하게 된다. 맹자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똘레랑스”라고 말했다. 한겨레에 지난해 1월 마지막으로 실린 홍세화 칼럼의 제목은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였다.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 신자유주의는 경제가 모든 걸 장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경제가 국가마저 지배합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방향은 사회가 중심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경제나 국가가 포함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내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우리에게 설득이란 단어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설득하는 사회’가 이나다. ‘강요하는 사회’다. 베르뜨랑과 나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이 차이를,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인가, 없는 사회인가의 차이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에선, 즉 설득하는 사회에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축출하지 않으며 깔보지 않았다.
또 강요가 통하지 않으므로 편견이 설 자리가 없었다. 택시운전사를 택시운전사로, 즉 그대로 인정했다.- 산 너머 산, 그 너머 또 산, 찬 하늘 아래, 외로운 낮밤을 보내고 있는, 형아, 동생아. 설움을 참으며 귀를 기울여, 들어라 남풍에 실려오는, 우리의 노래를, 아아 봄이 온다네. 오라. 오라. 봄이 오는 곳으로, 봄이 오는 곳으로, 웃으며 오라.
- 사람이 미래를 모르고 살면 불안하긴 하나 위험하지는 않단다. 아니, 미래를 모르고 사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를 모르고 사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란다. 그것이 개인의 과거이든 민족의 과거이든…..
- 드디어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갇혀 있던 섬이 다시 육지가 되었다. 나는 해방되었다. 희열로 젖어있는 몸으로 뛰었다. 육지였던 곳까지 뛰었다가 다시 섬이었던 곳으로 뛰었다. 신나게 왔다갔다하며 뛰었다. 나는 그가 되었고 그는 내가 되었다.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드디어 나는 하나가 되었다.
– 독자는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동대문 시장에서 두려움에 떨며 에드벌룬을 들고 가던 내가 어떻게 그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가를.
나는 그날로 서울로 향했다.- ‘당신들은 사람들도 아니네요….. 당신 나라의 야당은 그럼 무엇을 하나요? 교회는? 노동조합은? 그리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그럼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요?’
- 내가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네 나라의 ‘앙가주망’이라는 말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습지 않은가?……나는 또 이렇게 말하겠다.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나도 돌아가고 싶다, 코리아로. 노스도 싸우스도 아닌 코리아라는 나라로 말이다.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돌아갈 것이다. 나는 꼭 돌아갈 것이다. 나는 꼭 돌아갈 것이다.’
- 나는 눈물이 흔할 것일까? 나는 서울에서도 그처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문리대의 교정을 지나 쎄느강을 끼고 이화동 쪽으로 그리고 종로 5가까지 걸어가며 나는 바보처럼 울고 있었다. 70년 11월 중순,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의 나에게 또 하나의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이었고, 그것은 역시 눈물로 나타났었다. 그러나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은 그 만남으로 또는 눈물로 그쳐선 안될 것이다. 만남도 눈물도 사랑에서 오고 또 사랑을 요구한다. 또한 그 사랑은 사회 안에서 반드시 앙가주망(참여)를 요구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다만 ‘나 자신과 끝없는 싸움’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
- 나는 가끔 나의 동생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돌이켜 생각한다.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는 믿지 않지만 동생과 나의 이름이 잔인한 장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 항렬의 돌림자는 화(和)자였다. 틀림없이 평화주의자였을 젊은 나의 아버지는 첫째인 내 이름을 세화(世和)라 지었고 둘째의 이름을 민족평화라 하여 민화(民和)라 지었다. 한국전쟁에 민족평화는 죽었고 또 세계평화는 방황하다 끝내 이렇게 온 빠리의 길을 누비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우리들의 이름을 잘못 지었다는 생각을 하신 적이 있지 않을까? 나는 감히 여쭈어보지 못했는데, 틀림없이 허허롭게 웃기만 하실 것이다.
-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 이것은 내가 갖고 있는 여행문서의 목적지란에 적혀 있는 말이다. 다시말해 주네브협정에 의거 내가 발급받은 여행문서는 나에게 다른 모든 나라에는 갈 수 있으나 꼬레에는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서 꼬레만 분단되어 있고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는 분단되어 있지 않다 결국 나는 분단되어 있는 나라인 꼬레에만 못가고 분단되어 있지 않은 모든 나라에 갈 수 있다.
- 그리하여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삶은 곧 사랑이며, 삶의 가치관은 곧 사랑의 가치관이다. 사람은 표현을 하진 않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하며 살아간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또는 나는 당신만을 사랑한다 또는 나는 당신을 미치게 사랑한다 등의 말들도 알고 보면 사랑한다는 그 대상을 통하여 자기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자기 분열되고 해체되어 가지 자신을 사랑할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허깨비 같은 것이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병문안을 했던 김민섭 작가에서 써줬던 단어가 “겸손”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겸손

앙가주망이란 무슨 뜻인가? 사전을 펼쳐보면 ‘engagement’은 약속, 책임, 약혼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이 말은 일반적으로 ‘무엇엔가 연루되어 있음’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에 이 개념을 적용할 경우 문학이 도대체 무엇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일까? 사르트르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해의 실마리를 준다.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일단 언어의 세계에 끼어든 이상, 작가는 말할 줄 모르는 척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의미의 세계 속으로 들어서면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법이다.” 작가가 문학을 통해 일깨우는 것은 우리는 세계에 책임이 있다는 것, 즉 ‘상황’이라는 말로도 일컬어지는 ‘세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의미’에 연루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한 상황은 언어가 운반하는 의미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앙가주망은 상황과 의미 양자에 대한 연루 및 이 연루를 문학을 통해 일깨우는 일을 뜻한다. 그리고 작가란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이런 연루를 드러내기를 선택한 자이다. “한 작가가 진실로 참여하는 것은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투철하게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의식하려고 애쓸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자연적인 연루를 반성적인 연루로 전환할 때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작가는 신들림 같은 것을 통해 저도 모르게 마술적인 언어를 쏟아내는 자가 아니라, 상황에 연루된 인간의 운명을 드러내는 소명을 ‘선택’한 자이다. “작가는 결연한 의지와 선택과 저마다 삶을 추구하는 전체적 기도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앙가주망 – 문학이 지닌 정치적 힘 (생활 속의 철학, 서동욱)
위에 적힌 주네브협정이 망명자를 위한 내용이지만 원래 제네바협약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
제네바 협약은 ‘전투의 범위 밖에 있는 자와 전투행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자는 보호를 받아야 하고 존중되어야 하며, 인도적인 대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도의상의 요청에 의거하여 부상병·조난자·포로·일반 주민 등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법규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중세의 관습적 법규 안에서도 볼 수 있으나 근대적 관념으로서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장자크 루소였으며 그는 “전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국가와 국가의 관계이며, 여기에서 개인은 인간으로서가 아니고 시민으로서도 아니며 단지 병사로서 우연히 적이 되는 것”이며 또한 “전쟁의 목적은 적국을 격파하는데 있으므로 그 방위자가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한 이를 살해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순간 적 또는 적의 도구의 기능을 버리고 다시 단순한 인간으로 되돌아간 것이므로 이제 그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고 《사회계약론》에서 말하였다.
이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에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솔페리노 전투의 비참한 광경을 목격한 앙리 뒤낭(J.H. Dunant, 1828~1910)은 국제적 구호단체의 설치와 그 활동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의 체결을 제창했다. 그 첫째 제안은 각국 적십자와 적십자 국제 위원회의 설치라는 결실을 얻게 되었고, 둘째 제안은 1864년 ‘전장에 있는 부상병의 상태개선을 위한 조약’으로 길을 열었다. 이 적십자조약은 그 후 확대·확충되어 1949년의 4조약 즉 ‘전장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개선에 관한 조약’, ‘조난자의 상태개선에 관한 조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조약,’ ‘전시에 있어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조약’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