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

먼저 숲을 보자

“기업 경영에는 전략과 전술, 전투, 개인기가 다 필요하다. 전투가 직접 몸을 부딪혀 싸우는 것이라면, 전략과 전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것으로, 경영자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나는 일하고 챙기는 데 내 나름의 몇 가지 원칙과 습관이 있다. 먼저 목적을 명확히 한다. 보고를 받으려면 보고의 목적과 결정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한다. 다음은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파악한다. 본질을 모르고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본질이 파악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어보고 연구한다.

나는 삼성의 임직원들에게 ‘업(業)의 개념’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그런데도 ‘당신이 하는 일의 「업의 개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황한다.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며 달을 보라고 외치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만 쳐다보고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목적과 본질 파악이 나의 원칙이라면 숲을 먼저 보고 나무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의 습관이다. 동양과 서양은 크게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주소 표기법이다. 우리는 국가, 시·도, 시·군·구, 동·읍·면의 순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은 그 반대다. 나는 동양의 주소 표기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을 할 때 대소완급의 구분도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곧 일의 본질에 바탕을 두고 우선 순위를 판단하는 것이다. 어떤 공장을 방문했을 때 공장은 한창 건설중인데 조경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공장 건설이 최우선인데 정원을 먼저 가꾸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대소완급을 구분하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다.

최종 결심을 하기 전에 챙겨 봐야 할 또 하나 중요한 일은 정보의 확인과 활용이다. 우리는 대개 있는 사실(데이터)과 정보(인포메이션)를 구분하지 못한다. 바로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가의 사실 파악은 데이터이지 정보가 아니다. 정보란 그런 사실을 내가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다.

환율이 올랐다는 사실은 데이터에 불과하다. 환율이 오르는 데서 오는 득실은 무엇이고, 환차손을 줄이고 환차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곧 정보다. 데이터를 보고 읽는 관점에 따라 정보의 내용과 질이 달라진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관점을 달리하고 이를 의사 결정에 반영하는 것이 곧 정보 활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목적과 본질을 알았고, 숲과 나무를 보았으며, 대소완급의 판단 아래 관련 정보까지 활용하여 최종 결심을 했다면 다음은 일이 되도록 진행시켜야 한다.

원점에서 생각하자

해마다 연말이 다가오면 한 해를 결산하고 다음 해의 경영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그 경영계획을 보면 항상 지난 해의 실적과 비교하는 것이 일색이다. 전 해에 비해서 몇% 증가니, 신장이니 하는 단어들이 중심을 이룬다.

문제는 과거의 수치와 비교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과거의 연장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연장 사고는 예외없이 무사 안일로 이어진다. 삼성만 해도 ‘이 일의 목적이 무엇인가, 꼭 해야만 하나.’ 하는 의문 한 번 없이 그저 지시받은 대로, 선배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일하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과거에 대한 부정 없이는 개선도 없는 법이다. 모든 사물과 일을 대할 때 원점 사고를 갖고 새롭게 바라보아야 비로소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프로 골퍼들이 슬럼프에 빠지면 골프채 잡는 법부터 새로 시작할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원점 사고는 획기적인 개선과 대안 제시에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오늘날처럼 변화가 일정한 궤도없이 빨라지는 시대에 과거 지향의 연장 사고는 후퇴와 실패를 의미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부터 모든 것을 뒤집어 보는 원점 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영화 감상과 입체적 사고

경영이 무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답하면서 경영이든 일상사든 문제가 생기면, 최소한 다섯 번 정도는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원인을 분석한 후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자기 중심으로 보고, 자기 가치에 의존해서 생각하는 습관을 바구라고 권한다. 한 차원만 돌려 상대방의 처리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처럼 모든 환경이 초음속에 비견될 정도로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동일한 사물을 보면서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입체적 사고’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영화를 감상할 때는 대개 주인공에게 치중해서 보게 된다. 주인공의 처지에 흠뻑 빠지다 보면 자기가 그 사람인 양 착각하기도 하고, 그의 애환에 따라 울고 웃는다. 그런데 스스로를 조연이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면 아주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나아가 주연, 조연뿐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인생까지 느끼게 된다. 거기에 감독, 카메라맨의 자리에서까지 두루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그저 생각없이 화면만 보면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여러 각도에서 보면 한 편의 소설, 작은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려면 처음에는 무척 힘들고 바쁘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만들어진다. 음악을 들을 때나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또 일할 때에도 새로운 차원에 눈을 뜨게 된다.

말의 위력

나는 평소 임직원들에게 조직 내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가급적 통일시키고 조직의 철학과 가치관이 함축돼 있는 독특한 용어를 개발하라고 말해 오고 있다. 조직 내 언어인 용어는 경여 활동의 실행 수단이 될 뿐 아니라 바로 그 조직의 질적 수준을 가늠케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직 내 용어는 통일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개성을 무시하는 획일화와는 다른 차원이다. 용어를 통일하며 서로 이심전심으로 뜻이 통하게돼 의사소통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고 오해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직의 비전과 경영방침에 대한 공감대를 쉽게 형성해 나아갈 수 있다.

시뮬레이션 경영

“실제로 해보지 않고도 해본 것과 같은 결과치를 찾아내고, 그것을 어느 정도 정형화해두는 것이 잘하는 경영이다. 복잡한 세상, 급변하는 환경에서 모든 것을 직접 해볼 수는 없다.”

큰사람 작은 사람

“경영자는 자기 일의 반 이상을 인재를 찾고 인재를 키우는 데 쏟아야 한다. 아무리 우수한 사람도 엉뚱한 곳에 쓰면 능력이 퇴화한다. 그리고 한번 일을 맡겼으면 거기에 맞는 권한을 주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핵이 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누구의 지시를 받기 전에 먼저 일을 찾아서 한다. 눈가림이나 생색을 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만큼,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 기본에 충실하면서 자기 책임을 다한다.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니 자율과 창의도 넘친다. 그러니 핵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것이 내 일이라는 주인의식이나 ‘왜’라는 문제의식도 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은 점(點) 이외에 무엇이 되겠는가?

변해야 살아 남는다

“변화나 개혁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미래의 승자와 패자는 누가 먼저 고정관념을 깨고 변화를 정확히 알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첫째, 모든 변화는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심원의 파문이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커져 호수 전체로 확산돼 나가는 것과 같이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둘째, 변화의 방향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큰 배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저으면 배는 꼼작도 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변화가 가져올지도 모를 불편. 불이익에 저항하는 이기주의의 전형적인 예가 ‘총론 찬석, 각론 반대’다. 그러므로 변화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공감대를 확보하는 것이 성공하는 지름길이다.

마지막으로 한꺼번에 모든 변화를 이루려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혁명이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아무리 실력있는 산악인도 처음부터 에베레스트를 오르지는 않는다.

변화란 쉬운 일, 간단한 일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야 한다. 작은 변화라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변화가 가져다 주는 좋은 맛을 느껴 보고,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디자인이 결정한다

“디자인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수가 될 것이다.”

몇 년 전 미국의 어느 경영학자가 쓴 글에서 “과거 기업들은 가격으로 경쟁했고 오늘날은 품질로 경쟁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디자인에 의해 기업의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라는 내용을 읽고 공감한 적이 있다.

그 후 실제로 유럽 지역을 대상으로 제품 구매를 결정하는 요인을 조사했더니 디자인의 중요성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당시 고객들이 물건을 사면서 디자인을 고려하는 정도가 전자제품이 48%, 자동차는 38%, 산업용 장비가 3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소비자가 외국 제품을 구매하는 동기를 조사해도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디자인이 좋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상품 경쟁력의 요소는 기획력, 기술력, 디자인력의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이것이 과거에는 각각 더해지는 합(合)의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가각 곱해지는 승(乘)의 개념이 되었다.

경영자는 젊은이들과 자주 대화하고, TV 인기 드라마도 보면서 유행을 알고 디자인 감각을 키워야 한다. 또 개별 제품의 디자인에 대해서는 전문가 의견을 존중해서 섣불리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10대들이 쓸 상품 디자인을 50대 경영자가 결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칫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결과를 가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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