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종교적 근본주의

퍼온곳 : https://www.mk.co.kr/news/culture/10915844

조금 전에 뉴스에서 미국과 영국이 예멘 후티반군에 폭격을 가하자 후티반군에서 엄청난 반미시위가 벌어졌다.
당연히 자기네 존립에 위험을 받으니 시위에 나섰겠지만, 나는 엄청난 인파에 놀랬다.
중국의 인해전술이 생각날 정도이다. 이슬람 종교는 종교의 영향으로 다출산을 하므로, 앞으로 미래의 인구는 이슬람종교인이 가장 많을 것이고, 영향력도 엄청 높아질 것이다.
다만, 종교적 폭력성이 걱정이 되어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이 글을 퍼왔다.

 

“난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종교적 근본주의성서와 경전의 무오함(오류가 없음)을 추종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요.

문구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기독교식 원리주의뿐 아니라 타 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교 근본주의로 인한 대부분의 모든 불행은 ‘내가 믿는 신의 경전에는 절대 오류가 없다(무오주의·無誤主義)’는 그릇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힌두교 3대 경전이자 힌두교의 신약성경(구약성경은 ‘베다’)으로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 몇 문장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 서점에서도 수십 종의 판본을 판매 중이기 때문에 독서가 어렵지 않습니다.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바가바드 기타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일부. 야자나무 잎에 글을 쓰고 노끈으로 묶은 판본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인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가 바로 바가바드 기타에서 온 문장입니다. [Sarah Welch]

◎ ‘바라타의 아들이여, 싸우거라. 육신을 입은 자아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 죽임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옷이 낡고 닳으면 그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육신을 입은 자아 또한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입는다. 자아는 불멸하여 도처에 흐르는 견고한 부동의 영원성이다. 태어나는 모든 것들의 죽음이 확실하듯이, 죽음을 알아버린 것의 탄생 또한 확실하다.

위 문장은, 왕위 계승을 위한 전쟁을 거부하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가 참전(參戰) 당위성을 설득하는 대목입니다. 몸이 죽는다고 해도 자아(본래의 나이자 불멸의 자아, 즉 아트만)는 불멸하며, 인간의 몸은 윤회의 과정을 거치는 중인 껍데기이고, 진짜 아트만은 따로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윤회의 측면에서, 불교와 대단히 유사하지요?)

그런데 ‘아트만(인간의 본래 자아)’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전해지는 저 문장을, 2023년 현대사회에서, “죽여도 죽인 게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니, 싸워서 죽이고 죽어라”라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어찌 될까요.

아르주나
아르주나의 모습을 상상한 동상. 아르주나는 힌두교 대서사시에 나오는 중심인물입니다. 아르주나는 전쟁을 하면 사촌을 죽이게 된다는 점 때문에 왕위를 포기한 뒤 산에 들어가 살았지만, 전차를 모는 마부였던 크리슈나에게서 ‘우주의 원리(불멸의 자아)’를 들은 뒤 전쟁에 참여합니다. 위 인용문은 제가 알기로 힌두교 경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문장입니다. [Illusion]

이슬람교를 둘러싼 종교 근본주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슬림 절대 경전인 쿠란의 몇 문장은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오인되어 세상에 떠돕니다. 이는 무슬림 극단적 혐오의 근원인데, 일부를 옮겨 적어 봅니다.

(※쿠란은 옮겨 적는 일이 금지되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이니 양해 바랍니다.)

위 쿠란 9장 5절의 앞 문장만 보면 마치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라는 호전적인 문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5절 뒷부분과, 이어지는 6절을 읽어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 ‘만약 우상숭배자 가운데 어떤 자라도 너희로부터 보호를 구하거든 그를 보호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그를 안전한 그의 처소로 옮기라. 그것은 그들이 무지한 백성이기 때문이니라.’(쿠란 9장 6절)

이슬람교도 충분히 관용의 종교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경전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악용하거나 오독(誤讀)했던 인간이 문제였던 건 아닐까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벌어진 ‘학살’처럼 말입니다.

쿠란
이슬람교 경전 ‘쿠란’의 모습. [Cezary Piwowarski]

경전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근본주의 광신도가 출몰하기 마련이고, 그건 비(非)종교인이 종교와 신앙을 경멸하는 치명적인 근거가 되곤 했습니다. 경전은 그 문구가 집필됐던 당대의 시대상과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해석되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것이 경전을 대하는 바람직한 독법(讀法)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힌두교인의 바브리 마스지드의 철거도, 무슬림들의 방글라데시 다카에서의 학살도 종교적 관점에서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타슬리마 나스린은 저 당연한 사실을 지적했는데, 그녀는 삶의 모든 걸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 작가 나스린이 유죄로 선고되는 세상에선 어떤 종교적 화합도 불가능할 겁니다.

진정한 종교란 타 종교와의 관용 위에서 세워지는 게 아니었던가요. 불화했던 타인과의 화해가 종교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할 테니까요. 그러나 그건 너무 멀고 먼 이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타슬리마 나스린 서명
타슬리마 나스린 서명. [Wikimedia Commons]
‘나’의 죽음을 기쁘게 바라보는 자들이 있다면

작가 나스린은 원래 산부인과 의사 출신으로, 힌두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현재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 ‘무슬림 폭력’을 다뤘다고 해서, 그녀가 힌두교의 바브리 마스지드 철거를 옹호했던 것도 아닙니다. 책 ‘LAJJA’에서 그녀가 힌두교 광신도들의 폭력을 날선 문장으로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힌두교 옹호가 아니라 양비론, 나아가 인간이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광기를 고발한 것이지요. 종교적 이상과 정치적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녀는 성찰합니다.

◎ ‘너무나 많은 불안과 결핍이 있었다. 많은 피를 흘렸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20세기 말에도 우리가 이런 잔혹행위를 목격해야 했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종교의 깃발을 휘날리는 것은,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 정신을 무(無)로 만드는 쉬운 방법임이 항상 입증되어 왔다.’(36쪽)

타슬리마 나스린
타슬리마 나스린이 출간한 책들. 그녀의 책은 ‘LAJJA’(1994)를 비롯해 ‘Amar Meyebela’(1999), ‘Utal Hawa’(2002), ‘Ko’(2003), ‘Dwikhandito’(2003), ‘Sei Sob Ondhokar’(2004) 등이 전부 금서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선 읽을 수 없고, 인도 서부 벵골 지역에서도 금지됐습니다.

책 제목인 ‘LAJJA(라자)’는 부끄러움 혹은 수치심을 뜻하는 힌디어라고 합니다. 작가 나스린은 수란잔의 입을 통해서 끊임없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폭력 전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임을 타슬리마 나스린은 폭로합니다. 폭력 앞에서 두려움보다 부끄러움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이룬 성취입니다.

이슬람교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로 파트와가 내려진 뒤 실제로 한쪽 눈을 잃은 세계적인 거장 살만 루슈디는, 과거 타슬리마 나스린에게 보낸 공개서한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죽는 것을 기쁘게 바라보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라.”

타슬리마 나스린
타슬리마 나스린을 그린 그림. [Dr. ashok shukla]

우리에겐 생소한 그 이름 ‘타슬리마 나스린’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곧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인간의 선량한 마음을 ‘보호’하는 일이기 때문일 겁니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니까요.

악(惡)은 선(善)의 반대말이 아니라, 어긋난 믿음이 종교를 잘못 이해하는 순간 잉태되는 하나의 가혹한 현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교적 이상과 우둔한 현실은 늘 불화합니다. 소설가 타슬라마 나스린은 그 사이를 문학으로 메꾸려 했던 중재자로 기억되어야 할까요. 원래 저 중재는 신(神)이 맡았어야 했던 역할이란 생각이 뒤늦게 들지만 말입니다.

(※쿠란은 옮겨 적는 일이 금지되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이니 양해 바랍니다.)

◎ ‘그리고 금지된 달들이 지나갔을 때 너희가 우상숭배자들을 보는 대로 죽이고 포로로 잡고 공격하라. 그리고 모든 매복처소에서 엎드려 그들을 기다리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기도를 준수하고 쟈카트를 지불할 때 그때는 그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라. 실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시니라.’(쿠란 9장 5절, 안동훈·박병현·성하창의 번역, 사우디아라비아에 위치한 아하마디야 무슬림협의회에서 발행한 쿠란을 저본 삼았음.)

위 쿠란 9장 5절의 앞 문장만 보면 마치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라는 호전적인 문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5절 뒷부분과, 이어지는 6절을 읽어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One Comment

  1. 출처 : https://blog.naver.com/qens6666/221433420481
    우리는 선한 마음으로 국제회의를 통한 협정을 만들어가면서까지 그들을 돕고자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선의를 이용하여 우리의 미풍양속과삶의 터전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이것은 유럽인들이 이미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유럽에 들어간 무슬림들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이스람의 경전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고 그들의 율범이 그것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가 기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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