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가장이 평생 교사·제빵사·판매원·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해 집 한 채와 자동차 두 대를 갖추고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시대를 기억하는가? 나는 기억한다. 1950년대에 내 아버지 에드 라이시는 인근 도시의 도로변에서 상점을 운영하며 공장 근로자의 아내들에게 여성복을 팔았다. 아버지가 벌어 오는 수입으로 우리 가족은 편안하게 살 수 있었고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생활수준도 1950년대와 1950년대에는 꾸준히 상승했다.
이것이 미국인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미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0년 동안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거 중산층이 생겨났다. 경제 규모가 두 배로 커지면서 일반 근로자의 소득도 두 배로 늘어났다. 지난 30여 년간 미국 결제는 또다시 두 배가량 성장했지만 당시와 대조적으로 일반 근로자의 수입은 제자리에 머물렀다.
당시 대기업 CEO가 받는 급여는 평균적으로 일반 근로자의 20배 정도였지만 지금은 200배를 훌쩍 넘는다. 그 시기에 전체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최상위 부유층이 차지하는 소득은 미국인 전체 소득의 9~10%였지만 지금은 20%이상이다.
당시 미국 경제는 국민에게 희망을 안겼다. 열심히 일하면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랐고, 교육을 받으면 사회적 지위가 올라갔으며, 무엇에든 기여를 많이 할수록 보상도 커졌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일자리가 늘어나고 국민 대부분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자녀의 앞날에는 부모보다 여유 있는 삶이 기다렸고 경제 게임의 규칙도 기본적으로는 공정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이야기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경제 체제에 대한 신뢰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 경제가 드러내는 명백한 임의성과 편파성 때문에 냉소주의가 넘쳐 난다. 경제·정치 체제가 조작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다.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존재는 더 이상 공산주의도 파시즘도 아니다. 바로 현대 사회가 성장과 안정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신뢰의 지속적인 쇠퇴다. 성공할 기회를 자녀가 공정하게 누리리라고 대부분의 부모가 믿지 못하는 순간에 구성원의 자발적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는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때 사소한 절도·사기·부정·반동·부패 등 파멸을 불러오는 크고 작은 요소들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경제 자원의 구심점은 서서히 생산에서 보호 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현상을 반전시켜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가동하도록 경제를 재창출할 힘이 있다. 칼 마르크스의 생각과 달리 자본주의에는 가차 없이 경제 안정을 추구하며 불평등을 확대하는 요소가 없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기본 규칙은 영구적이지 않으며 사람이 결정하고 실행한다. 하지만 무엇을 바꾸고 달성해야 하는 지 결정하려면 먼저 어떤 현상이 어째서 발생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나는 25년 동안 책을 쓰고 강연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일반 근로자가 잘살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곤란한 지경에 점점 더 깊이 빠지는 원인을 밝혀왔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세계화가 진행되고 기술이 바뀌면서 선진국은 일반 근로자는 대부분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과거에 수행했던 작업은 이제 외국의 값싼 노동력이나 컴퓨터로 작동하는 기계로 더욱 저렴하게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내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이렇다. 행동주의 정부를 세워 부유층에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하고, 국민이 잘사는 데 필요한 우수 학교과 수단의 확충에 투자하고, 빈곤층에게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크기를 줄이고 세금과 재분배를 축소하는 것이 모두에게 더욱 바람직하게 경제를 작동시킨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제안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그동안 발생해온 사회 현상에 대한 보편적인 설명은 여전히 적절하지만 매우 중요한 현상을 간과하고 있다. 경제 운용 규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과 금융계의 엘리트들에게 정치적 힘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제안했던 정부 차원의 채결책은 몇 가지 점에서 핵심을 벗어나 있다. 경제 게임의 규칙을 정할 때 정부가 담당하는 좀 더 기본적인 역할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심각하게는 ‘자유 시장’과 행동주의의 정부가 지닌 장점을 둘러싼 논쟁에 불이 붙으면서 다음 몇 가지 중요 주제에 대한 관심이 분산된다.’어떻게 시장은 50년 전과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었을까?’ ‘어째서 현재 시장 조직은 과거와 달리 국민에게 폭넓게 번영을 안기지 못할까?’ ‘시장의 규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해당 주제에 대한 관심이 분산되는 것이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기업 임원, 대기업 소속 변호사와 로비스트, 월스트리트 종사자와 그들의 정치 하수인, 수많은 부자를 비롯해 ‘자유 시장’ 개념을 목청껏 지지하는 인물들은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고 여러 해에 걸쳐 시장을 적극적으로 재조직해왔고 해당 주제가 집중조명 받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주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저술한 의도다. 내 주장은 담백하다. 1부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시장의 존폐를 결정하는 요소는 재산(소유할 수 있는 대상), 독점(시장 지배력을 허용하는 정도), 계약(교환할 수 있는 대상과 조건), 파산(구매자가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경우에 발생하는 현상)을 지배하고 시행하는 규칙이다.
이러한 규칙은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 게다가 과거 수십 년 동안 대기업·월스트리트·부자가 정치 기관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규칙은 계속 바뀌어왔다.
이와 동시에 1930년대부터 1970년대 말까지 미국 중산층과 하위 중산층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노동조합, 소기업, 소액 투자자, 지방 정당 등 대항적 세력이 쇠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거대 부자들이 재산을 더욱 증대시키려고 시장을 조직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에선느 부가 중산층과 빈곤층에서 소수 집단인 부유층으로 유례없이 큰 폭으로 상향 이동하고 있다. 이렇듯 부의 상향 분배는 시장 내부에서 발생하므로 대부분 외부에서는 감지할 수 없다.
2부에서는 이러한 사회 현상이 소득과 부의 분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한다. 근로자가 시장에서 자기 가치만큼 급여를 받는다는 실력주의의 주장은 시장이 어떻게 조직되는 지와 그 조직이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합당한지를 둘러싼 의문을 외면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힘이 있어서 게임의 규칙을 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 소득과 부가 더욱 집중된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대기업의 CEO와 월스트리트의 일류 트레이더와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자기 급여를 효과적으로 설정하고, 기업의 이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시장 규칙을 바궈가면서 내부 정보를 이용해 재산을 증식한다. 그러는 사이에 일반 근로자의 급여는 앞서 설명했듯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갖춘 대항적 세력이 사라졌으므로 전혀 오르지 않는다. 근로 빈곤층과 비근로 부유층이 동시에 부상하면서 소득과 노력은 더 이상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시장 내부에서 부가 상위층으로 왜곡되어 집중되는 현상은 빈곤층과 하위 중산층에게 이전지출(실업수당이나 사회보장금처럼 정부가 다른 경제 주체에게 반대급부 없이 지급하는 것-옮긴이)을 지급하거나 부유층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을 통해 대규모로 부의 하향 재분배를 실시하라고 요구하는 시장 외부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정부 크기를 둘러싼 자극적인 논쟁에 불을 붙일 뿐이다.
3부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해결책은 정부의 크기와 관계가 없다. 문제는 정부의 크기가 아니라 정부가 누구를 위하느냐다. 시장 조직 방법에 미치는 영향력을 대다수 국민이 다시 획득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항적 세력이 새로 탄생해서 경제 성장에 따른 이익을 공유하지 못한 대다수의 경제적 이해당사자를 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좌파와 우파가 ‘자유 시장’이냐 정부냐를 둘러싸고 펼치는 싸움은 이러한 연합의 형성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외골수 행태다.
앞으로 미국에서 발생할 최대 정치적 분열은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정치적 게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정하는 대기업·월스트리트 은행·부자의 집단과 결과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될 대다수 국민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수순을 뒤집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게임의 규칙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대다수 국민이 조직을 형성하고 통합해서 50년 전 경제 번영을 확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대항적 세력을 다시 결성하는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에 초점을 맞춰 이 책을 서술하기는 했지만 내가 뜻하는 현상은 세계 다른 국가에서 실시하는 자본주의에도 차츰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다른 국가도 미국의 현상에서 유추한 교훈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각국의 규칙에 따라 비즈니스를 수행해야겠지만 국가와 상관없이 거대 국제기업과 금융 기관이 규칙 성립에 점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경제와 시장 규칙이 자신을 위해 작용하지 않는 현실에 직면해 무기력에 빠진 일반 국민의 늘어나는 불안과 좌절은 치명적인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고 인종차별주의와 반이민주의 정서를 부추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선진국에서조차, 정치적 불안정을 자극한다.
(Page29)
‘자유 시장’을 형성하려면 다음 사항을 결정해야 한다.
- 재산 : 무엇을 소유할 수 있는가
- 독점 : 시장 지배력을 어느 정도로 허용하는가
- 계약 : 무엇을 어떤 조건으로 사고팔 수 있는가
- 파산 : 구매자가 대가를 지불할 수 없을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 시행 : 어떻게 해야 아무도 규칙을 어기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Page30)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시장 지배력이 발휘되는 정도,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경제적으로 막강해지는 정도, 표준 플랫폼이나 검색 엔진에 대한 지배력이 부당하게 경쟁을 억제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또한, 결정에 따라 미지급 부채의 운명이 좌우된다. 대기업은 직원에게 연금을 지불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파산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주택 소유자가 주택 담보대출을 줄이고 싶거나 학교 졸업생이 학자금 대출을 줄이고 싶어도 파산을 이용할 수 없다.
국민은 경찰관·조사관·검사가 설정한 우선순위, 사법절차의 결과, 정부의 규칙 제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 기소할 위치에 있는 사람 등 규칙 시행 방식에 대한 결정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결정 가운데는 결코 명쾌하지 않은 결정이 많고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기도 한다. 사회 가치(노예 제도)나 기술(새로운 분자 배열에 대한 특허)이 변하거나, 결정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공무원과 공무원을 특정 직위에 임명하는 사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해당 결정은 자유시장을 ‘침범하지’ 않고 자유 시장을 형성한다.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애당초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결정을 이끌어내는가? 규칙을 정하는 사람은 무엇을 달성하려 하는가? 규칙은 효율성(사회에서 소득과 부의 현재 분배 상태를 고려한다)이나 성장(경제 성장으로 혜택을 입는 사람은 누구인지, 환경오염 등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사회가 기꺼이 치르는 희생은 무엇인지에 따라 다르다) 또는 공정성(공정하고 온당한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에 관한 지배적인 규범에 다라 다르다)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아니면 세 가지 요소를 합해서 만들어질 수도 있다.
민주주의가 원래 목적대로 작동한다면 선출직 공무원, 내각 관료, 판사 등은 국민 대부분이 생각하는 가치에 맞춰 규칙을 정할 것이다. 철학자 존 롤스가 제안했듯, 공정한 규칙은 자신이 규칙으로 어떤 영향을 받는지 모르는 일반 국민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면 ‘자유 시장’은 대다수의 행복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실패하고 있거나 처음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대다수 국민은 상대적으로 빈곤하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반면에 소수인 상위층은 더욱 큰 부를 장악할 것이다. 힘과 자원을 충분히 소유한 사람은 정치인·관리 기관·판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도록 ‘자유 시장’을 가동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부패가 아니다. 미국에서 힘과 자원을 소유한 사람은 정부와 계약을 체결하는 등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공무원을 직접 매수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선거 후원금을 기부하고 관직에서 물러나면 고소득 일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양측이 주고받는 가장 귀한 대상인 시장 규칙은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고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직적이고 불균형하게 특권층에 유리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경제 게임의 승자와 패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독특하고 감지할 수 있는 정부의 시장 ‘침범’이 아니라 정부가 시장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시장규칙이 형성되고 이에 따른 경제적 이익과 손실이 ‘비인격적인 시장 지배력’이 작용한 ‘자연적인’ 결과로 포장되는 과정에는 권력과 영향력이 숨어 있다. 하지만 ‘자유 시장’과 ‘정부’의 상대적인 장점에 집중하여 토론에 집착한다면 가면을 꿰뚫고 진실을 볼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저자 : 로버트 라이시 (안기순 옮김)
- 발행 : 2016.8.12(1판1쇄)
- 발행처 : 김영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