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17
지난 6월 12일 대마도 답사를 위해 부산항에서 배를 탔으나, 바다에는 아직 태풍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파도가 높아 배를 돌려 부산으로 되돌아와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2차로 출발하는 대마도 답사에는 대마도 답사 불가시 경주 답사를 위한 계획을 준비했다.답사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서울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철이라서 혹시 배가 뜨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출발시간은 새벽3시였다. 그런데, 문제가 나한테 발생하고 말았다. 내가 깜박 잠이 든것이다. 전화를 받고 겨우 3시에 일어나 김밥을 찾으러 갔는데, 거기에도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밥집아줌마가 새벽2시30분을 오후 2시30분으로 착각을 하여 김밥을 준비해 놓지 않았다. 급한대로 김밥 21개를 준비하여 올림픽회관에 도착하고 나서 사무실에 들러 기념품을 준비하고 내려오고 출발할려고 하니, 갑자기 여권을 집에 놓고 온 것이 생각이 났다. 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30분이 경과하여 자칫하면 대마도에 가는 배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난 그래서 먼저 출발하시라고 했다. 난 KTX를 타고 부산으로 따로 출발하겠다고…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빨리 집에 갔다오라는 것이다. 다행이 우리집은 중부고속도로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중간에 버스를 세우고 집으로 정신없이 달려서 여권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버스가 출발한 시간은 9시 45분이었다.내 몸에서는 땀이 비오듯이 흘렸다. 내 정신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중간에 대전을 지나고 나서는 비가 오지 않았다. 부산은 구름만 조금 낀 날씨였다.
가는 길에 파도가 조금 높아 우회하여 가느라 1시간 정도 연착되었다. 우리는 도착하자 바로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분위기가 일본식이고 식사테이블 또한 길게 되어 있어 마치 야큐샤모임에 온 것 같았다.제일 먼저 최익현선생순국비가 있는 수선사로 향했다. 구한말 대 유학자이자 구국 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 유배되어 순국하자 선생의 유해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 절에서 장레를 치른후 부사항으로 이송되었고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비를 세웠다. 더우기 이번에 동행하신 단국대중앙박물관장님이신 정영호 교수님께서 당시 비를 세울때한일양국을 다니시면서 많은 분들을 설득하고 도움을 받아 비를 세우는데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에도시대의 통신사절단을 말한다. 통신사는 이름 그대로 믿음(信)으로 통하는(通) 사절단(使)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는 국교회복을 바라며 조선에게 통신사를 다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통신사는 총12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마지막은 대마도까지만 갔다. 대마도는 에도(지금의 도쿄)로 가는 중간기착지였다.
조선통신사
최대 500명에 달했으며, 통신사를 맞이하는 비용은 100만약을 넘었다고 한다. 더욱이 대마도와 같은 작은 섬에서 통신사 500명과 수행인원이 머무를 곳을 마련하느라 임시숙소를 지어야 한다는 등 비용마련에 고심했던 기록들을 일본 역사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아리랑축제가 매년 8월 첫째 주말에 열린다. 최근 몇십년간 대마도내 대한민국의 역사찾기에 노력하신 분들이 생전에 노력하신 것을 후세에 계속 보존하기 위해 대마한국선영회라는 것을 만들어 1년에 1번씩 대마도내 한일역사교류의 자취를 찾아 순례하고 역사유물들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계신다고 한다.
이번에는 정영호박사님의 대장경에 관한 역사해설이 이어졌다. 대장경은 총 3개가 있으며, 고려 8대 현정의 전남 나주의 행국시 만든 초조대장경(600본 1질)이 있으나, 병란에 불에 타 없어졌으며, 의천이 만든 속장경은 구인사에 보관중에 불에 타 없어졌다. 현재에 남아 있는 것은 몽고항쟁시 만든 8만대장경이다. 이것은 본래 강화도 선운사에 보관중이었으나, 바다의 염분 등에 장기 보존이 힘들 것 같아 합천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에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중에서 초조대장경으로 인쇄한 600본 1질이 대마도에서 발견되어 대마역사민속박물관 2층에서 보관중이다. 당시 보관중인 불경이 초조대장경인지 몰라 국내에서 권위있는 역사가 몇 분이 찾아서 초조대장경으로 인쇄된 것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대마역사박물관입구는 그냥 출입문만 통과하면 바로 박물관이었다. 그때 상임감사님이 한말씀하셨다. 우리나라박물관는 입구가 웅장해서 위화감을 주어 일반인의 출입이 일상처럼 자유롭지 못하다고.
다음은 조선 26대 고종의 왕녀인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소우 타케유키백작과 결혼하였다. 이비는 두분의 성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정영호 박사님과 대마도 유지가 후손을 설득하고 정부에 건의하여 국유지내 10평의 공간을 마련하여 복원한 것이다.
반쇼인은 전형적인 일본의 신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절문은 모모야마양식으로 창건당시 그대로이며, 토구가와 역대 장군들의 위패 및 조선통신사 관련유물이 있는 일본3대 묘지중의 하나로써 국가지정 사적이다. 그렇게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모기도 참 많았다. 입구와는 달리 계단을 올라가니 조금은 무서웠다. 안좋게 말하면 공동묘지가 아닌가..
[반쇼인]
<반쇼인 입장시 나눠준 안내자료>19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는 임진왜란이후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하여 조선통신사 초청을 성사시킨 인물로서, 반쇼인은 20대 도주 소오 요시나리가 아버지 요시토시의 명복을 빌며 1615년에 창건한 송음사(松音寺)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서 반쇼인이라 개칭하여 이후 소오가의 보리사가 되었으며, 일본 3대 묘지중의 하나로 국가지정사적이다. 절문은 모모야마(1568-1600)양식으로 창건당시 그래로이며 현재의 본당(本堂), 고리(庫裡)는 1879년에 세워졌다. 정문에 있는 인왕존(仁王尊)은 수호신으로 모셔졌던 것으로 대마 최고(最古) 건물이라고 전해진다.
[소오가 무덤]
돌계단을 올라가면 역대 도주들의 묘석이 장엄하게 줄지어져 있는데, 묘지는 상단, 중단, 하단 등 세곳으로 나뉘어져 하단에는 일족 및 소오가에서 출가한 사람, 중단에는 측실과 아돌, 상단에는 역대 도주와 정부인의 묘석이 있다.
특히, 대마의 영고성쇠는 그들의 무덤의 크기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가장 큰 무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기에 살다간 20대와 21대 도주의 무덤이며, 임진왜란때 선봉장으로 나서야 했던 소오 요시토시의 무덤이 가장 작다. 역대 도주들은 큰일이 있을 때마다 요시토시의 무덤 앞에서 결정을 했다고 하는데, 조선과의 평화를 최우선시하라는 그의 유언때문이었다.
[토쿠가와 역대 장군의 위패]유형문화재
2대 장군 히데타이부터 13대 장군 이에사다와 그 자손들의 것을 합쳐 모두 16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초대 이에야스의 위패는 없지만 초상화가 비장되어 있다. 에도시대(1600-1867) 막부가 대마도주에게 조선과의 외교.무역을 일임했었다는 등의 토쿠가와(德川)정권과 대마도주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 위패는 반쇼인의 남쪽에 있는 權現堂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을 이관한 것인데, 조선통신사는 이 權現堂에 참배하고나서 반쇼인으로 향했다고 한다.
[三具足] 은제
향로, 화병, 촛대로 조선으로부터 막부에 기증한 것
[거목-삼나무]천연기념물
전란전에는 20거루 정도 있었으나 현재 3거루만 남아 있다. 둘레 5.2 -7m, 높이 35-40m의 거목으로 1600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섬 전체에서 최고령인 삼나무이다.
첫날 일정의 마지막으로 서산사에 갔다. 서산사에는 임진왜란의 위협을 느낀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알아오게 하였으나, 2명의 사신의 의견이 서로 달랐을 때 일본은 침략의 의도가 없다고 말한 학봉 김성일선생의 비석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2명의 사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진기록에 학봉이 말한 것이 전한다.
“난들 왜 몰랐겠느냐”
이말은 그당시 당파싸움이 얼마나 심했는가는 알려주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