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저자 : 토니 마이어스 | 앨피

인터넷 유튜브를 보다가 조던 피터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토론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통해 조던 피터슨을 알게 되었다. 유튜브를 통해 슬라보예 지젝의 논리에 조던 피터슨이 밀렸다. 나중에 조던 피터슨은 토론 준비가 부족했음을 인정했다. 나는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책은 그가 쓴 책은 아니지만 그에 관한 책이다.

책의 맨 앞에 있는 옮긴이의 글을 읽고 이책을 포기하려 했다. 너무 어려운 말로 번역자가 적어 놓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철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저 슬라보예 지젝이 어떤 사상가인지 알려는 정도의 수준인데, 너무 어렵다.

그나마 본문이 이해하기 쉬웠다.

지젝은 구 유고슬라비아인 류블랴나에서 태어났다. 공산주의 체계하에서 모든 영화사들에게 배급 영화 일체를 지방 대학 자료실에 제출하도록 강제한 법률은 당시 지젝이 배급된 미국와 유럽 영화를 모두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할리우드 전통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게 했으며, 이후 지젝의 저작 활동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지젝은 설명할 때 영화를 예시를 들면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지젝은 10대 시절부터 영어로 쓰여진 문학에 몰두했으며, 이런 문화적 관심 속에서 철학에 대한 취미를 키워갔고, 열일곱 살 무렵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류브랴나에서 공부하던 중 첫 저서를 발간하고 철학과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문학철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 여행중에 만난 라캉의 사위인 밀레르의 도움으로 정신분석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으나, 지젝이 정신분석학으로 두번째 박사학위 논문을 출간하려고 할때 밀레르는 거부하였으며, 그로 인해 지젝은 크게 좌절하였다.

슬로베니아로 돌아가 모든 에너지를 연구활동에 쏟아부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출간 이후 지젝은 맹렬한 창작열로 영어로 된 것만 열다섯 권의 저서와 다수의 편집 서적을 펴냈다. 엄청난 양과 질을 담보한 출판 작업 외에, 지젝은 국제 강연회도 의욕적으로 개최하여 지금까지 네 대륙의 청중들에게 자신의 문자 속에 녹아 있는 에너지를 직접 전해주었다.

지젝 이론의 놀라운 성공은 부분적으로 이른 시기에 겪은 실패와 그 실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제와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젝 특유의 사유를 주조한 것은 그가 속한 철학 담론과의 차이 혹은 소외였다. 지젝의 이론은 객관적 체계 속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주체적이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지젝이 ‘주체’ 형성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개별적인 특징과 특정한 욕구, 관심, 믿음을 제거했을 때 남겨지는 것이 바로 주체이다. 주체는 사람에 따라 개별적이며 고유한 의식의 내용이 아니라 의식의 형식이다.
이는 너무나 추상적인어서, 그런 주체라면 도저히 시내를 어슬렁거리는 동안 만나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이 주체가 바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다. 민주주의는 개별 국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휴머니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람들에 맞춰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무런 감정도 없는, 오직 형식적인 추상에 의해 만들어졌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안에는, 어떤 구체적인 인간적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공동체적 결속의 진정성에 내어줄 자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추상적 개인들의 형식적 결합일 뿐이다.”

지젝이 다른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분야는 주로 철학, 정치학, 전신분석학이다. 각 분야마다 그에게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는데, 철학에서는 게오르그 헤겔, 정치학에서는 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크 라캉이다. 먼저 헤겔의 철학은 지젝의 사유 방법에 대한 일정한 형태를 부여했으며, 마르크스의 저작은 이론의 차원을 넘어선 실천적 동기와 근거를 제공했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지젝이 사용하는 분석용어와 개념적 틀을 제공했다.

지젝은 “주체”가 상실, 자기 자신의 철거, 자신의 토대 또는 본질 자체의 축출로 구성된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언제나 자신의 상실을 회복하려고 하는 향수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주체가 주체로서의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주체 외부에 남아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 주체는 주체가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외재화시켜야 한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주체는 자기 외부의 대상이다. 주체는 지젝이 라캉을 따라 ‘그 자신에 대해 외밀함의 관계’라 불렀던 것을 함축한다. 외밀함이란 ‘외재적인’과 ‘내밀함’을 합성한 말이다. 이 외재적인 내밀함, 혹은 외밀함은, 주체의 존재 한가운데 있는 것이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방식을 가르킨다. 이를 이해하기 어렵다면, 본인의 안구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일부, 즉 안구만은 볼 수 없다. 안구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우리 외부에 투사시키는 거울을 보는 것이다. 주체는 바로 이와 같은 위치에 있다. 주체는 그 자체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으며, 오직 현실의 ‘거울’ 속에서만 보이는, 현실에 비친 관점이다.

우리 자신을 언어나 그 외 상징적인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지젝은 ‘주체화’라 부른다. 지젝은 “주체화에 저항하라! 네 이름을 바꾸라!”라고 외친다.

이책에 있는 지제에 대한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젝이 어떤 시대에 살았으며, 어떠한 사상가인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 만에 읽은 철학책이라 초반에 너무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도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데카르트가 코기토를 처음 생각해 낸 추운 겨울날 화덕 가에 앉아서 철학에 젖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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